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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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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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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tle: D-100

Author: 김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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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roduction

죽기로 결심했다. 희망이 생겼다. 서른 셋이 되지 않을 것이다. 영원히 서른 둘로 남도록 다음 생일이 오기 전 이 세상을 떠나겠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다.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남은 생은 죽음을 준비하는데 쓰도록 하겠다. 남겨질 이들의 짐을 조금이라도 덜어내기 위해 살겠다. 왜 진작 포기하지 못했을까. 무슨 미련이 그렇게 많았을까. 뭐 때문에 그렇게 아등바등 했을까.

스타카토를 살 것이고, 사격장에서 연습을 해 볼거다. 그리고 이글크릭의 내 마지막 자리에 답사를 가보겠다. 그곳까지 가는 길이 너무 춥지 않은, 봄이 오려나 싶은 그쯔음이면 되지 않을까. 막상 이렇게 결정을 내리고 나니 아쉽기도 하다. 그 전까지 한국에 다녀올 시간은 없겠지. 근데 그게 나을지도. 자연스럽게 사라지기. 원래 그랬던 것 마냥, 원래 없었던 사람처럼!

열심히 모아둔 마일리지도 상속(?)이 되려나?

장례식은 어떻게 될까. 아는 이들에게 연락은 다 닿을 수 있을까. 연락처도 만들어두어야하나 아니면 그들이 모르길 바라며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아야하나. 그렇지만, 어떻게든 알게되고 소식을 들을거라면면 마지막 인사를 할 장소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들을 위해. 뭐 상관 없다면 정말 다행이지만, 그렇지만 마지막에 쏟아낼 곳이 없어서, 추억할 기회를 놓쳐서 마음에 더 큰 짐으로 남고 싶지 않다. 추억되고 싶다기보다는 마지막으로 나를 털어낼 수 있는 자리는 마련해주고 싶다. 그랬다더라 그랬대 시시콜콜하게 떠들어댈 수 있는 장소를 그들에게 주어야하지 않을까. 그러면 장례식은 한국과 미국 두 곳에서 하게되려나.

시원섭섭하면서도 괜히 눈물이 난다.

우선 돈을 모아야한다. 빚을 최대한 많이 갚아두고, 장례비용을 준비해두고, 장례 절차를 준비해두어야한다. 유언을 준비해야한다. 얼마 안되는 돈들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고 beneficiary를 지정해야한다. 피임을 다시 시작해야한다. 마지막으로 만날 사람들이 있을까? 아니, 조용히 떠나겠다. 그때 만났을 때 말 한 마디 더 할걸, 알아차릴걸 하는 마지막 후회는 남기고 싶지 않다. 사망보험도 다시 확인해야겠다. 필요하다면 방법을 바꿀 수 있도록. 비밀번호들도 어딘가에 적어두고, 나의 물건들을 정리해야한다.

그리고 마지막 프로젝트로, 글들을 올려둘 내 웹사이트 하나정도 만들어보고 싶다.

와야했던 길을 돌아돌아온 기분, 끝내 답을 찾은 느낌! 약간의 슬픔과 아쉬움에 목이 메이기도 하지만, 이렇게 홀가분하고 설레고 신날수가! 죽음을 생각하는 기분은, 로또맞은 상상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 약간 비현실적이기도 하지만, 괜시리 미소가 지어지는 즐거운 상상!

이래서 사람이 죽을때가 되면 변한다고 하는걸까? 너무 신나고 즐거워. 보고싶은 사람들을 보고 마지막 정리를 하기엔 내 욕심인것 같아서 그들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가려고 한다. 그걸 생각하면 좀 먹먹하지만, 그들은 더한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겠지. 그럼 나는 내 몫의 그리움정도는 감당해야하지 않을까? 그래 그정돈 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을거라면, 아무 연고도 없는 엉뚱한데 가서 죽을래. 어느 국립공원, 인적이 드문 길. 빨리 발견되는게 나을지 아니면 그냥 실종된 채로 한동안 있는게 좋을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겠다. 근데 이것조차 즐거운 상상이라면 나 너무 미친 사람 같을까? 고민을 하며 미소짓는 나를 보았다. 행복한 선택지들 사이에서 고민하는 나.